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정리노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차이(노트).hwp

 

 

* 원작 : 1841년 3월 작성.

* 독어판 서지사항 : Karl Marx, Karl Marx, Friedrich Engels: Werke Band 40, 1968.

* 독어판 인터넷링크 :

http://www.zeno.org/Philosophie/M/Marx,+Karl/Differenz+der+demokritischen+und+epikureischen+Naturphilosophie 

* 영어판 서지사항 : Karl Marx, Marx-Engels Collected Works Volume 1, trans. Andy Blunden, Progress Publishers, 1902.

* 영어판링크 :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1/dr-theses/index.htm

* 한국어판 서지사항 : 칼 맑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고병권 옮김, 그린비, 2001.


저자서문

- 연구의 목적, 방향 : 17-18쪽.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 철학사에서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이 논문에서 풀었다고 믿고 있다. … 이 논문은 내가 에피쿠로스, 스토아, 회의주의 등 일단의 철학들이 전체 그리스적 사유와 맺는 관계를 세부적으로 다루게 될 더 큰 저작을 위한 선행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 18쪽. 헤겔은 이들 철학이 지닌 체계의 보편성은 파악했지만, 그 자신의 사변철학이 너무 강해 그들의 철학적 의의를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심장 안에서 단 한 방울의 피라도 고동치는 한, 철학은 에피쿠로스와 함께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외칠 것이다. ‘불경한 사람은 대중에 의해 숭배되는 신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생각을 신들에게 덮어씌우는 사람이다.’ 철학은 그것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고백.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모든 신들의 무리를 증오한다.’ 이것은 최고의 신성으로서 인간의 자기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신들에 대한 철학 자신의 고백이며 선언이다. 그 어떤 것도 그것[자기의식]과 나란히 존재할 수 없다.”(19-20쪽)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그리고 회의주의학파는 “자기의식의 철학자들”이었다.(22)


1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일반적 차이

1. 논문의 대상

- 문제의식 : 에피쿠로스, 스토아, 회의주의 학파는 그들의 전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들의 부록으로 간주되곤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데모크리토스 자연학과 키레네 학파 도덕론의 절충적인 혼합체로, 스토아 학파는 자연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적 관점과 견유주의적-윤리적 세계관에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가 조금 가미된 결합체로 간주된다. 끝으로 회의주의는 이 도그마주의들에 대항하는 필요악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이 철학들을 일면적이고 편향적인 절충주의로 간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알렉산드리아 철학과 결합시켰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리아 철학은 완전히 몽상과 착란(기껏해야 의도의 보편성만이 인정될 뿐인 혼란)으로 간주되었다.”(29-30)

- 30-31. 하지만 에피쿠로스주의, 스토아주의, 회의주의는 근대 세계가 그들의 정신적 시민권을 인정해야 할 정도로 특별하고 강력한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왜 에피쿠로스, 스토아, 회의주의는 총체성으로 확장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후에 나왔으면서도 그들에 의존하지 않고, 소박한 학파들(자연철학, 소크라테스)에 의존한 것일까? 이들에게서 자기의식의 모든 계기들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일까? 이들의 체계들이 자기의식의 완전한 구성을 형성하는 것은 우연일까?

- 32. “비록 그리스 철학의 내용에 있어서는 예전의 체계들이 더 흥미롭고 중요할지 몰라도, 그리스 철학의 성격, 즉 주관적 형식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여러 체계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 학파들이 훨씬 흥미롭고 중요해 보인다. 그리나 철학적 체계들의 정신적 담지자인 주관적 형식은 여러 체계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정들 위에서 지금까지 완전히 망각되어왔다.”


2.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학의 관계에 대한 판단들

- 33-35쪽.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난과 비방 : (1) 스토아학파 -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를 표절했다. (2) 플루타르크 - 에피쿠로스는 그리스 철학의 모든 오류를 가지고 있어서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3) 교부철학 - 에피쿠로스는 신의 섭리를 어기려 한다. (4)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5) 라이프니츠. 이들 모두는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이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빌려왔다고 보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3.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동일성에 대한 난점들

- 36.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학문의 진리성과 확실성 및 그 적용, 그리고 사상과 현실의 관계 일반 등 모든 점에서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 A. 인간 지식의 진리성과 확실성에 대한 견해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평가는 모순적이다. 그는 한편으로(��영혼론��)는 ‘데모크리토스는 현상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영혼과 지성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형이상학��)는 ‘데모크리토스는 진리가 없으며 혹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회의주의적이고 모순적인 데모크리토스의 견해는 원자들과 감각적인 현상세계와의 관계가 규정되는 방식에서도 전개된다. 한편으로 감각현상(Erscheinung)은 원자들 자체에 속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상(objektive Erscheinung)이기보다는 주관적 가상(subjektive Schein)이다. 진정한 원리는 원자와 허공이며, 그것들은 너무나 작아서 감각될 수 없으며, 심지어 “이념들”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감각적 현상만이 유일하게 참된 대상이고, 아이스테시스[감각지각]가 프로네시스이다.”(37-38쪽) “이 참된 실재는 변동하는 불안전한 현상들(Phänomen)이다. 그러나 현상들이 참된 실재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때로는 한 측면이, 때로는 다른 측면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모순은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 채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38쪽) 데모크리토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38-39쪽.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현자는 회의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정설적(dogmatisch)으로 행동한다’면서 ‘모든 감각들이 진리의 전달자다’라고 말한다. “감각적 지각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리고 개념 역시 부정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 역시 감각적 지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가 감각세계를 주관적 가상으로 만든 반면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객관적 현상(Erscheinung)으로 본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진리기준은 감각지각이고, 그것에는 객관적 현상이 조응한다.

- B. 학문의 확실성과 그 대상들의 진리에 대한 이론적 판단의 차이. 데모크리토스에게 원리는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현실성과 실존을 갖지 못한 채 있지만, 반대로 그는 실재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세계로서 감각지각의 세계를 맞은 편에 가지고 있었다. 이 세계는 주관적 가상으로, 그 이유는 그것이 원리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의 독립적인 현실 안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동시에 고유한 실재적 대상을 자신의 가치와 의미로서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데모크리토스는 경험적 관찰로 뛰어든다. 철학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실증적 지식의 품 안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의 진리에 대한 불만은 그를 “널리 돌아다니고 수집하고 외부를 조사”하게 했다. 결국 “그가 진리로 생각한 지식에는 내용이 없었고, 내용이 있는 지식에는 진리가 없었다.”(40쪽)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철학 안에서 만족과 지복을 누렸다.”(41쪽)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그것[철학]으로 인해 진정한 자유가 너의 몫이 되게끔 철학에 종사해야 한다. 철학에 자신을 내던지고 종속시킨 이는 기다릴 필요없이 즉시 해방된다. 철학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경험적 지식의 품에 내던진 반면, 에피쿠로스는 실증적인 여러 학문을 경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지혜의] 참된 완성에는 아무런 기여도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적, 문법을 경멸하는 자”로 불렸다.

- C. 사유의 존재에 대한 관계와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반성형식의 차이. 데모크리토스는 현실에 대한 반성형식으로 필연성을 사용한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에게 “필연성이란 운명이자 법이며 섭리이자 세계의 창조자다. 그러나 이 필연성의 실체는 질료의 반대유형이고, 운동이고, 충격이다.” 에피쿠로스는 이와 반대다. “몇몇 사람들이 만물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것은 우연적으로 생겨나고, 어떤 것은 우리의 자의에 의존하고 있다. 필연이란 확신될 수 없으며, 반대로 우연은 불안정한 것이다. 자연학자들의 에이마르메네[숙명]에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신들에 관한 신화를 따르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후자는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염원이 이뤄지길 바라는 희망이라도 남지만, 전자에는 냉혹한 필연성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우연이다.”(디오게네스 라에티오스) 에피쿠로스는 어떤 필연성 개념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심지어 선언판단조차 거부한다.(예컨대 ‘인간은 살거나 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에 종속된다.’가 가진 숙명성을 피하기 위해서) 데모크리토스는 한편으로 우연을 보편적이고 신적인 것으로 여겨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생긴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연을 인간생활과 경험적 자연에서 멀리하고 우연을 말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하였다. 보편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데모크리토스적 필연 개념은 우연과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 이렇게 데모크리토스가 필연 개념을, 에피쿠로스가 우연 개념을 사용하면서 서로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의 결과는, 개별적인 자연현상에 대한 그들의 설명방식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필연성은 유한한 자연 안에서 상대적 필연성, 결정론으로 나타난다. 상대적 필연성은 실재적 가능성으로부터만 연역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제약과 이유, 근거들의 주위에서 연역되는 것으로, 상대적 필연성은 이것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실재적 가능성은 상대적 필연성의 전개다. 그리고 이것이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발견한다. … 우연은 어떠한 개별적 사건의 원인도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원인들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45쪽)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에게 우연은 단지 가능성의 가치밖에 없는 현실성일 뿐이다. “추상적 가능성은 실재적인 가능성의 직접적 대척점이다. 후자[실재적 가능성]는 지성이 그렇듯이 날카로운 경계 안에 구속되는 반면 전자[추상적 가능성]는 환상이 그렇듯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실재적 가능성은 그 대상의 필연성과 현실성을 기초지으려 하지만, 추상적 가능성은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라 설명하는 주체에 관심을 갖는다. 대상은 단지 가능한 것, 사유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추상적으로 가능한 것,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주체에 어떤 장애나 한계가 되지 않으며, 어떤 걸림돌도 아니다. 여기서 관심은 대상으로서의 대상에는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이 가능성이 과연 현실적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개별적인 자연 현상들의 설명에 대해서도 매우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였다.”(46쪽) 그래서 그는 여러 견해 가운데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모든 의견이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는 대상들의 실재 근거를 조사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설명하는 주체의 차분함이다. 모든 가능한 것들은 가능한 것들로 인정되므로, 분명 존재의 우연은 사유의 우연으로 옮겨진다.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가 부여하는 단 하나의 규칙인 ‘설명이 감각지각에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방식이 오직 자기의식의 아타락시아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 자연에 대한 즉자 혹은 대자적 인식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자신의 아타락시아와 지복으로 끄는 한, 그것을 근거가 없다거나 충분하게 정확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60쪽)

- 데모크리토스가 회의주의자이며 감각세계를 주관적 가상으로 보면서도 경험과학과 실증적 지식에 몰두하고, 그가 관찰한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면, 에피쿠로스는 정설가이고, 감각세계를 객관적 현상이자 실재로 보면서도 경험을 비웃고, 그 자신 안에서 만족된 사유의 평온함과 내적 원리로부터 지식을 획득하는 자립성을 체화하고 있었다. 즉 감각적 자연을 주관적 가상으로 보는 데모크리토스는 그것을 필연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사물의 실재적 실존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한 반면, 에피쿠로스는 모든 곳에서 우연만을 보며, 그의 설명방식은 오히려 모든 객관적 실재성을 지양하는 경향을 띤다.

 

4.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일반적 원리상의 차이

- 60-68쪽. ‘4장’의 본문과 ‘5. 결론’장의 원고는 유실되었고, 4장의 주석만 남아있음. 헤겔과 헤겔학파에 대한 논평이 담겨있는 주석2는 주목할 필요가 있음.

- 헤겔과 관련해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체계에 대한 규정들을 현실과의 적합 등을 향한 그의 욕망으로 설명했을 때, 즉 그것을 “도덕성의 관점”(61쪽)에서 설명했을 때, 이는 그들의 무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완성된 것으로서 받아들인 학문에 대해 크게 감명을 받아서 순진하고 무비판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것에 자신들을 내던졌다면…, 스승의 통찰 뒤에 숨겨진 의도 때문에 스승을 비난하려는 그들의 시도란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스승에게 학문은 그들과는 달리 물려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고 있는 어떤 것이었으며, 스승 자신의 가장 고유한 정신적인 심장의 피가 말단에 이르기까지 고동쳤던 것이다! … 헤겔과 그의 체계와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실체적이었던 것과 달리 그 제자들의 것은 단지 반성된 것일 뿐인데도, 이 사실을 망각하고서 그 제자들은 자신들이 헤겔에게 돌린 형식 아래서 이전의 상황과 대결한다.”(61쪽)

- (청년)헤겔학파 식으로 말해, 헤겔철학이 현실과의 적합을 위해 이러저러한 비일관성을 범했다면, 그 순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그의 철학의 비일관성이 아니라 그의 철학 체계가 현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철학 원리 자체에 어떤 불충분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어야 했다. “나는 헤겔학파의 다수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비철학적 흐름을 규율에서 자유로 이행하는 데 항상 수반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일단 그 자체로 자유롭게 된 이론적 정신이 실천적인 에네르기로 된다는 것, 그리고 의지로 아멘테스의 저승에서 걸어나와 이 현세적이고 정신없이 현존하는 현실에 대해 몸을 돌리는 것은 심리학적 법칙이다. … 그러나 철학의 실천은 그 자체로 이론적이다. 개별적 실존을 본질에서 측정하고, 특수한 현실을 이데아[이념]에서 측정하는 것은 비판이다. 그러나 철학의 이러한 직접적인 실현은 그것의 가장 내적인 본질에서 모순을 수반하고, 이러한 철학의 본질은 현상 안에서 형태를 취하며 그 위에 자신의 봉인을 찍는다.”(62쪽) 헤겔학파가 헤겔에게서 현실과의 적합성 여부를 따진 것은 비록 그것이 운동 중인 헤겔철학을 고정시키고, 자신들의 도덕적 관점[철학은 현실에 부합해야 한다]을 부여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철학하는 인간의 정신이 의지를 통해 현실에서 자신을 실현하려는 자연스런 노력의 일환일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의 실천조차도 그것이 ‘내적인 본질적 의식’에서 출발하는 한 그 자신의 이론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 비판이다.

- “철학이 의지로서 자신을 현상계에 대립시킬 때: 체계는 하나의 추상적인 총체성으로 낮아진다.”(62쪽) 그만큼 철학적 체계의 내적인 자기완성은 깨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즉 세계의 철학적 생성은 동시에 철학의 세계적 생성이며, 그것의 실현은 동시에 그것의 상실이라는 것, 그리고 철학이 외부에서 대립하며 투쟁하고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내적인 결함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투쟁에서 철학 자신은 그것이 손상들로 만족해서 맞서 싸웠던 바로 그 손상들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고 철학은 그 손상에 빠짐으로써 비로소 그 손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등. 철학이 적대하고 있는 것, 철학이 싸우는 것이야말로 바로 철학이라는 것, 그리고 단지 전도된 요소들을 동반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62-63쪽)을 의미한다.

- 주목할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사태를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철학의 직접적인 실현으로서 생각할 때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사태는 또한 주관적[주체적]인 측면을 갖는데, 이 주관적 측면은 그것의 다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른 형식이란 “현실화되는 철학적 체계가 자신의 정신적인 담지자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철학적 진보를 나타내주는 개별적인 자기의식들과 맺는 관계”이다. “이 관계 즉 철학 자체의 실현 안에서 세계와 대립하는 이 관계로부터 이러한 개별적 자기의식들은 언제나 양날의 요구를 함께 갖는다. 한쪽 끝은 세계를 향해서 겨누어지고, 다른 쪽 끝은 철학 자체를 향해서 겨누어진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는 사태에 대한 전도된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이러한 개별적인 자기의식들 안에서는 이중적인 것으로, 즉 서로 모순되는 요구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철학으로부터 그것들[자기의식들]이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은 동시에 자신들을 일정한 체계로 족쇄채우고 있던 철학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된다. 그것들[자기의식들] 자체는 먼저 행위와 전개의 직접적인 에네르기 안에서 파악될 뿐이어서, 아직 이론적인 점에서는 그 체계를 초극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체계의 조형적인 자기동일성과의 모순만을 감지할 뿐이며, 체계에 적대적으로 되어감으로써 단지 그 체계의 개별적인 계기들을 실현하는 데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63-64쪽)

- “철학적 자기의식의 이러한 이중성은 결국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중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한 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자유주의적 분파로 철학의 개념과 원리를 주요 규정으로 고집하며, 다른 한 쪽은 그것의 비개념, 즉 실재성의 계기를 주요 규정으로 고집한다. 후자가 바로 실증철학이다. 전자의 활동은 비판이며, 따라서 정확히 철학의 ‘자기 외부를 향한 선회’이다; 후자의 활동은 철학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철학의 ‘자기 내부를 향한 선회’이다. 후자가 철학에 결함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반면 전자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했던 세계의 결함이라고 파악한다. 이 각각의 분파들은 정확히 타자가 원하는 것,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자신의 내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원리와 자신의 목적을 모두 의식하고 있다. 후자에게는 정신착란이라 불러도 좋을 전도가 나타난다. 내용에 관해서: 자유주의 분파는 실제 진보를 이루는 데 그것은 자유주의 분파만이 개념의 분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증철학은 그 형식이 의미와 모순되는 요구들과 경향들을 초래할 뿐이다. 첫 번째에서 철학과 세계의 전도된 관계이며 적대적 분리로서 나타나는 것은 두 번째에서는 자신 안에서의 개별적인 자기의식의 분리가 되고, 마침내는 철학의 외적인 분리와 이중성으로, 두 개의 적대적인 철학적 방향들로 나타난다.”(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