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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1.1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좋음'을 목표로 삼는다. 
1.2 모든 기술에서 으뜸가는 기술의 목적은 그것에 종속되는 목적보다 더 좋다.

2.1 선 중에서도 최고의 선(좋음)은 목적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다.
2.2 여러 가지 기술(기예) 중에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은 정치학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치체 안에서 어떤 학문이 연구되고, 어느 정도까지 배워야 하는가를 정하는 것은 정치학이기 때문이며, 또한 정치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를 입법함으로써, 다른 학문의 목적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그러한 정치학의 목적은 바로 인간을 위한 좋음이어야만 한다.

3.1 그러나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훌륭한 행동이나 옳은 행동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각각의 견해차가 크기 때문에, 규범적(nomos)으로만 존재하고, 자연적(physis)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정치학 연구의 결론이 개연적일 수 있음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3.2 젊은이는 정념을 따르기 쉽기 때문에 정치학의 청강자로 적합하지 않으며, 이성적인 원칙에 따라 욕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지식이 유익하다.

4.1 정치학이 목표로 삼는 최고의 선은 행복(eudaimonia)이다.
4.2 플라톤은 이 논의를 함에 있어, '제1원리(arche)로부터의 논의'와 '제1원리를 향한 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좋은 습관 속에서 자란 사람은 '제1원리로부터의 논의'가 별도로 얘기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랜 습관으로 이미 충분하고 옳은 출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5.1 삶의 형태에는 (1) 향략적 삶, (2) 정치적 삶, (3) 관조적 삶이 있다.
5.2 그렇다면 좋음과 행복은 무엇인가? (1) 어떤 이들은 쾌락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짐승과 우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2-1) 어떤 이들은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 하사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만큼 그 자체로 선일 수 없다. (2-2) 어떤 이들은 덕(arete)이 정치적 생활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덕을 가지고 있지만 일생동안 아무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부족하다. (2-3)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라고 말하는데, 돈을 버는 생활은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며, 그것은 유용한 것일 뿐이고, 또 다른 어떤 좋음에 의존한다.

6. 플라톤(주의) 비판
6.1 플라톤주의자들은 보편적 좋음을 논하는데 있어 '형상(eidos)'을 끌어들였다. 이들에게 선(좋음)은 (제2) 실체나 성질, 관계에 사용되며, (제1) 실체(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는 본성상 관계보다 앞선다.
6.2 모든 선에 공통되는 이데아란 없다. 선은 존재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단일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각각의 선에 속하는 여러 학문이 있음을 의미한다.
6.3 나아가 '선 자체'나 '개개의 선'은 그것들이 모두 선인 한에 있어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또 선 자체가 영원하다고 해서 다른 선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도 없다. 영원히 흰 것이 한 나절 흰 것보다 더 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4 플라톤학파에 따르면 선은, 그 자체로서의 선과 그런 선들로 인해 선인 것 이렇게 2가지가 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의 말처럼, 그 자체로 선하면서 다른 선들과 독립되어 있는 선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논의하는 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6.5 그리고 그런 선을 설혹 획득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러 학문들에 실제로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의사가 선 자체를 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치료행위에 도움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인간의 건강, 아니 개개 인간의 건강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7.1 궁극목적으로서 최고의 선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구하려는 것이며, 그것은 행복이다. 명예나 쾌락이나 지성(nous)이나 그 밖의 덕의 경우도 모두 우리가 행복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7.2 궁극적 선은 자족(autarkeia)으로 생각되곤 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자족이란 고립된 사람에게 충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포들을 위해 충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정치적(politicon)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족은 그것만으로 생활을 바람직한 것이 되게 하며, 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행복이 바로 그런 것이다.
7.3 인간에 속하는 목수나 피혁공은 자신의 기능 내지 활동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을 포함하는 인간 자체도 그 자신의 기능이나 활동이 있을 것이다.
7.4 생명(생육적 삶)은 식물에게나 인간에게나 공통된다는 점에서 인간 특유의 기능은 아니다. 지각적 삶 역시 소나 말에게 공통적이다.
7.5 결국 남는 것은 영혼(psyche/soul)의 이성적 원리의 활동적 삶뿐이다. 이때 이성적이라는 말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성적 원리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적이요, 다른 하나는 이성적 원리를 소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적이다. 그에 따라 이성적 원리의 삶은 2가지 의미(dynamis, energeia)를 지닌다.
7.6 이처럼 인간의 기능이, 이성적 원리에 순응하거나 그 원리를 포함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사람이란 이러한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좋음이란 결국 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덕이 여러가지가 있다면 그 중 가장 좋고 가장 완전한 것에 일치하여 영혼이 활동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선(좋음)이다.

8.1 좋음은 지금까지 3종류로 나눠져왔다. 외부적인 좋음, 영혼에 관계되는 좋음, 신체에 관계되는 좋음이 그것이다. 이중 영혼에 관계되는 좋음이 가장 탁월하고 참되며, 이때 영혼에 관계되는 좋음이란 정신의 능동과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 좋음이 능동이나 활동을 목적으로 삼는 한에서, 그것은 외부적인 좋음에 들어가지 않는다.
8.2 행복한 사람은 잘 살며, 잘 행하는 사람이다. 행복은 일종의 좋은 삶 혹은 좋은 행위(eupraksia)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을 덕있는 활동으로 보는 것(이는 덕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덕있는 활동은 덕을 행사하는 것이다.) 역시 우리의 정의에 부합한다. 덕있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하며 또 잘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즐겁다. 왜냐하면 쾌락이란 정신의 상태인데, 각 사람에게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의 삶은 외부로부터 우연히 밀려오는 쾌락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그 자체 속에 쾌락을 지니고 있다.  
8.3 이것은 델로스 신전에 새겨진 말을 떠오르게 한다. "가장 고귀한 것이 가장 옳은 것이요, 가장 좋은 것은 건강이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니." 이 모든 특성이 최선의 여러 활동에 속해있으며, 이 활동이 바로 행복이다.
8.4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은 또한 외부적인 여러 가지 좋음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적당한 수단이 없으면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좋은 친구나 많은 재물, 정치권력, 좋은 집안, 좋은 자녀, 미모 등. 행복은 이런 류의 좋은 조건을 구비해야만 될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행복을 덕과 동일시하지만, 다른 이들은 행복을 행운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9.1 이런 이유로, 행복이 학습이나 습관, 훈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인지, 신의 섭리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생기는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만일 신이 인간에게 선물을 준다면, 행복이야말로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며, 혹시 행복이 학습이나 훈련에 의해 얻어진다고 해도 그것 역시 가장 신적인 것임에는 분명하다.
9.2 행복은 덕에 대한 능력이 아주 없어지지 않는 한, 누구나 학습이나 마음 씀씀이에 의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은 우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영혼의 덕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9.3 정치학의 목적은 최고의 선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폴리스의 시민을 일정한 성격을 가진 인간이 되도록, 즉 좋은 인간, 또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9.4 우리는 소나 말을 두고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소년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하다는 말을 듣는 소년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가지는 소망 때문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은 온전한 덕과 삶 전체를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의 행운 속에서 살다가 최후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프리아모스 대왕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10.1 그렇다면 아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행복할 수 없는가? 그럼 행복을 일정한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2 하지만 죽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악과 선은 죽은 사람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 이때 악과 선이란 자손들의 명예와 불명예, 행운과 불운 같은 것이다. 물론 행복하게 죽은 사람이 사후의 변화로 비참해진다고 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10.3 만일 운이 사람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같은 사람을 두고도 때로는 행복하다, 때로는 비참하다고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운에 달려 있지 않다. 운은 삶에 부차적인 것일 뿐이지만, 반대로 덕있는 활동은 영속적이다. 덕있는 활동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특성은 그것의 지속성이다. 지속성은 행복한 사람에게 속하며, 그는 평생을 통해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덕있는 행동과 사색에 몰두할 것이요, 또 그가 "참으로 선"하고 "나무랄데 없이 곧으면" 삶의 여러 변화를 고상하면서도 품위있게 겪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정신의 고귀함과 위대함으로 불행을 겪어내면서 자신의 덕성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사람치고 비참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행복한 사람은 변화하기 쉬운 사람도 아니다. 그는 쉽사리 불운에 의해 행복한 상태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11. 설혹 죽은 사람에게 선과 악이 그 자손에 의해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미약한 만큼 무시해도 좋다.

12.1 행복은 찬양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소중히 여겨질만한 것인가?
12.2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과 덕있는 사람은 그들의 행동과 기능때문에 찬양받지만, 그렇다고 찬양이 최선의 것들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정의를 찬양하지 않는 것처럼 행복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복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행복이 덕이나 선보다 보다 더 신적이고 보다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2.3 찬양이나 칭송은 덕의 결과로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 하는 것이다. 행복이 칭송받을만한 것이 아닌 것은 그것이 칭송보다 더 좋은 어떤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행복은 소중히 여겨지는 완전한 것들 중에만 속한다.

13.1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면, 덕의 본성은 무엇인가?
13.2 이때 덕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적 덕', 즉 '정신의 덕'이다. 정신의 비이성적 요소에는 식물적인 것, 즉 음식물의 섭취와 성장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이성적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인 것이 있다. 물론 그 속에는 이성적 원리에 대립하여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 면도 있다. 그것은 욕구적/욕망적 요소이다. 자제를 잘 하는 사람은 이 요소가 이성적 원리에 순종한다.
13.3 그리고 이성적 원리에도 두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 속에 이성적 원리(수학적 원리를 인식하는 것)를 가지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부친의 말을 순종하는 것처럼 순종하는 경향을 가진다.
13.4 덕에도 이러한 구분이 있다. 즉 덕에는 지적인 덕(철학적 지혜, 이해력)과 도덕적인 덕(온화함, 절제)이 있으며, 우리는 이 두가지 모두를 지닌, 즉 현명하거나 절제력있는 이들의 칭찬할만한 정신상태를 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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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니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