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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Commonwealth 40쪽.
참고도서: [17세기 영국의 수평파 운동], 이승영 지음, 민연, 2001. '3장 수평파 운동의 전개' 중 발췌.

- 1645년 6월 의회군의 네이즈비 전투를 끝으로 청교도 혁명(의회파와 국왕파의 내전)이 끝나자, 전쟁기간 드러나지 않았던 분파의 대립이 의회파 안에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분파는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뉘는데, 전자는 의회를, 후자는 군대를 각각 장악하고 있었다. 1647년 초 의회는 혁명군을 해산하려 했으나, 군대는 이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수평파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수평파 지도자들은 군과 공동행동을 벌이자는 취지의 팜플렛을 발간하면서, 런던의 분파주의 회중과 급진 정치인들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엉성한 조직을 신형군(New MModel Army)으로까지 확대하기 시작했다.
- 수평파는 분명 그들의 적대자들이 붙인 이름이겠지만, 수평파 지도자 릴번은 다음과 같은 냉소를 통해 수평파라는 이름을 공식화한다. 

"그들이 크롬웰과 아이어턴과 앞서 언급한 그들의 동맹자들의 전제, 억압, 부정을 더는 참으려고 하지 않으나... 모두가 다같이 평준화되고, 법률에 의해 구속되는 (당신들이 말하고 있는) 평준화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한에서 나는 그들과 더불어 수평파임을 실토한다."
 
수평파는 독점의 확산으로 그들의 경제적 지위가 위협받던 직공이나 소장인, 그들의 밀린 급료를 의회가 메꾸어줄 것인지 아닌지, 전쟁 중에 저지른 행동을 사면해줄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던 군인들, 그리고 내전이 끝난 후 종교적 자유를 박탈하려던 의회의 의도를 우려한 분파주의자들을 대변했다. 릴번은 그들을

"징박힌 신발을 신은 사람들, 사병들, 가죽과 양모로 만든 앞치마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영국의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고 전했다.

- 군대와 손잡게 된 수평파는 1647년 3월 의회에 <대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단순히 의회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법 운영에 관한 시정을 요구하는 수평파의 근본적인 개혁안이었다. 릴번은 장로파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으며, 직접 인민에게 호소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제출된 문서를 의회가 불태우고 그 문서의 작성자들을 '인민의 적'으로 선언하고, 나아가 그들의 장교를 구속하자 군대의 반발과 분노는 격앙됐다. 6월 4일과 6월 5일에 각각 발표된 신형군의 <겸허한 항의>와 <엄숙한 서약>은 이제 군대가 명확히 하나의 정치적 혁명 집단으로 변신했음을 뜻하며, 수평파는 이 강력한 집단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크롬웰과 페어팩스 장군은 군대의 태도에 놀라 6월 10일 런던시에 부친 편지에서, 군인으로서는 의회에 복종하지만 영국인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자유이며, "병사라고 해서 조국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군대는 6월 14일 더욱 강도를 높인 <군대의 진정>을 선언하면서, 혁명군이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에 봉사하기 위해 고용된 군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인민의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수차에 걸친 의회의 선언에 따라 소집되어 나왔다"고 밝혔다.
- 그러나 처음 군의 한정된 요구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이던 장교와 사병이 입헌적인 개혁 문제에 이르러서는 의견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병들 사이에 이미 릴번을 위시한 수평파의 영향력이 깊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장교들과 사병들의 입장차이가 독립파와 수평파의 차이임을 보여준다. 
- 1647년 10월 5개 기병연대의 사병들은 5월에 선출된 사병대표 대신 새로운 대표를 다시 선출하고, 이들은 사병들의 불만과 의혹을 모두 기재함과 아울러 전면적인 입헌상의 개혁안을 담은 선언서 <군대의 진정한 주장>을 군 사령관 페어팩스 장군에게 재출했다. 이 팜플렛은 민간인 수평파와 군대 수평파가 합작한 것으로, 거기에는 신형군 장교들의 얼버무림과 타락,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부총회가 소집되었고, 5개 연대의 사병대표들이 제출한 문서가 "청교도 혁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헌정상의 개혁"이라고 불린 이른바 <인민협약>이다.
-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군대의 기본방침을 결정하는 회의가 1647년 10월 28일~11월 1일 사이에 런건 근교의 퍼트니 교회에서 열렸다. 회의는 크롬웰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었는데, 사병들은 크롬웰이 군대의 이름을 팔아 국왕과 수상쩍은 막후 교섭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크롬웰은 이러한 상황에서 "적대자로 만날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마음으로 만나야 할 것"이라고 수평파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 "각축하고 있는 두 진영이 서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에는 그들의 주장 사이에 너무 두드러진 골이 패였으며,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은 결국 실력 대결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조짐을 보였다."

- 퍼트니 회의의 핵심쟁점은 선거권 문제와 정치체제에 관한 문제였는데, 여기에서는 정치체제에만 한정시켜 얘기해보자. <인민협약> 1조는 "단일 입법기구가 인민을 대표하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인민협약>을 읽은 후 크롬웰은 "이 문서는 왕국의 통치 그 자체에 중대한 변경을 포함하고 있다"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뒤이어 이 문서를 뒷받침하는 생각은 "비열한 공상과 추론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이것을 저지하려는 속셈으로 이 제안의 가부를 논하기 전에 "우리들 군대에게 어떤 의무가 부과되어 있는가, 우리들은 어느 범위까지 계약의 구속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면서 와일드만과 레인버러는

"일단 계약을 체결하면 비록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원칙은 매우 위험하고... 권리와 자유, 자연법과 인민의 법에 바탕을 두는 군대의 최초의 선언에 어긋난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이어턴에게는 기존의 계약(성문법)이 정부와 소유권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파기하는 것은 무정부상태를 초래한다고 보았지만, 병사대표들에게는 어떠한 계약도 '인민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으며, 인민의 권리를 규정한 <인민협약>에 따른 정부의 변혁은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어턴은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의 원천"이라고 응수했다.


- 장로파 의원에 대한 추방요구를 '자연법과 인민의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던 <군대의 건의>가 아이어턴이 쓴 것이라면 그의 생각은 불과 4개월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와일드먼은 바로 이 점을 공격했다. 그는 의회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보고, 군대의 최초의 선언인 <군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군대는 자연법과 인민의 법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사람들은 설령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태만할 때라도 자기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 ... 따라서 만일 누구든 인민을 파멸시키려는 일을 할 경우 절대로 옳지 못하므로 인민은 그에 맞서 자신을 지켜도 괜찮을 것이다."
- 국왕과 상원의 폐지를 주장하는 수평파의 의견이 존속을 주장하는 아이어턴의 견해를 압도하는 듯 보였을 때, 크롬웰은 국왕제와 상원제 자체의 불필요함을 시인하면서도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폐지하는 것은 "욕되고 죄악스러운 행위를 우리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신 스스로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면서 한발 물러서는 듯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국왕제와 상원의 존속을 지지하려 했다. 그러나 정면돌파로는 수평파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크롬웰은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토론은 지연되었고, 위원회가 설립되어 과격분자들을 색출해 토론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11월 8일 크롬웰은 병사대표와 장교대표 모두를 해임하고 <군대의 주장>과 <인민협약>을 토론할 새로운 위원회의 구성을 결정하고 전군 집회 대신 3군대로 나누는 분산집회를 결정했다. 릴번과 수평파는 크롬웰을 인민의 배반자라고 규탄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크롬웰 암살계획이 공공연하게 떠놀았다.
- 크롬웰은 11월 14일 페어팩스 장군의 선언을 통해, 병사들에 대한 밀린 급료의 지불과 사면, 불구 상이병과 유자녀에 대한 구호를 보장하는 동시에 의회의 조속한 해산과 새의회 선출이 가능한 평등선거권을 약속했다. 11월 15일 크크부시에서 열린 군의 첫 집회에서 크롬웰과 페어팩스는 군에 대한 통솔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러한 군부총회에 반대해 반대집회를 열었지만 수평파의 핵심인 릴번과 해리슨의 연대만이 참석했고, 나머지 전군은 페어팩스와 크롬웰의 권위에 복종했다. 크롬웰은 곧바로 그 기세를 몰아 주모자를 체포했고, 그 중 3명을 군법회의 회부시켜 사형을 선고했다. 11월 19일 하원은 이러한 크롬웰의 행동을 지지하는 감사결의를 했다. 아휴 수평파의 세는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 1648년 5월 제 2차 내전이 일어나자 릴번의 크롬웰에 대한 비난도 수그러들었다. 우선은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군의 침입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8월 초 의회는 독립파와 대결시킬 목적으로 릴번의 석방과 3,000 파운드의 보상금 지불을 의결했다. 그러나 릴번은 상원의 책략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크롬웰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내가 당신에게 손을 댈 때는 당신의 영광의 절정에 올라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진리와 정의의 정도에서 벗어나 있을 때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그 올바른 길을 굳건히 그리고 공정하게 걸어갈 때, 내 심장의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당신에게 바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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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니오 Trackback 0 Comment 0